2020년 회고

by Joongi Kim

미국에 5번 출장으로 총 한달 반을 넘게 있었던 2019년과 달리 2020년은 단 한번도 해외에 나갈 수 없었던 해였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전세계가 사회적 거리두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상 유례없는 봉쇄조치와 마스크 대란, 집합금지 명령, 재택근무의 일상화 등 많은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가까운 지인들 중에 자가격리 대상자가 된 경우는 있어도 직접적으로 감염된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었고 가족들 친구들 다들 무사히 지내고 있다는 점이다.

래블업

이제 5년차 스타트업으로서, 드디어 death valley를 지나 scale-up을 할 수 있는 상태에 다다랐다. 이제 어느 정도 지속가능한 비즈니스가 되었다. 소위 말하는 product-market-fit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기에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도, 혹은 대표님 혼자만의 힘으로도, 또는 다른 그 누군가 혼자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모두가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모두에게 감사하다.

특히 12월 31일 새벽까지도 바빴던 것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지구 반대편의 모 연구소에 납품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지 정부의 예산 집행 시한(...)으로 인해 무조건 연말까지 설치완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지라, 그쪽도 연말 휴가 중간에 나오고 우리는 상큼하게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12시간 시차로 인한 밤샘 근무 모드에 돌입했다. 사실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아예 현지로 출장을 갔겠지만.... 25시간 가까운 편도 비행시간과 시차를 생각하면 이러나 저러나 힘든 건 마찬가지였을 듯. 어쨌든 막판 테스트 과정에서 발견한 다양한 안정화 이슈들을 거의 다 해결할 수 있었고 성공적으로 기초 교육 세션 및 데모 기반 튜토리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게 31일 새벽이었던 것 (현지 시간으로는 30일 오후).

2021년에는 본격적인 scale-up을 할 생각이다. 이제 현재의 인원(11명)으로는 업무량이 한계에 다다랐고, 공식적으로 DevRel과 sales account manager 포지션을 오픈하였다. 원래는 2020년을 해외진출 원년으로 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2021년으로 연기하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미국과 우리나라의 코로나19 백신 접종 상황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진행상황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향후 좀더 자세한 근황을 전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코로나19로 인한 지연이 본격 해외진출을 하기 전에 다양한 대기업 고객을 확보하고 해외 납품 사례도 경험함으로써 오히려 내실을 좀더 잘 다질 수 있는 기회였다고도 생각한다.

Python

올해도 6년 연속으로 PyCon KR에서 발표하였다. asyncio 대신 type annotation을 주제로 하였는데, 회사일이 너무 바빠지다보니 +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으로 진행을 하다보니 스스로 좀 집중력이 떨어진 감이 있어 아쉽다. 내년에는 다시 오프라인 행사를 할 수 있을까? 회사 내부에 집중하다보니 외부 발표가 내 스스로 보기에 좀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앞으로 균형을 어떻게 잡아야 할 지 고민이다.

한편으로는 숙원사업이었던 Python changelog에 이름 석자 박기 미션을 성공하였다. Python 3.10 alpha 2부터 contextlib에 closing()의 async 버전인 aclosing() 함수를 추가하였고 신기능 목록에 등재되었다. 계기는 async generator의 deterministic closing이 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memory leak처럼 보일 수 있는 현상(정확히는 asyncio event loop에 의한 context switch가 발생하면 gc가 되지만 테스트나 벤치마크용 코드에서 별도의 context switch를 하지 않을 경우 일시적으로 메모리에 generator 객체가 누적됨)에 대한 이슈를 트래킹하다가 aclosing을 명시적으로 하면 해결이 된다는 점을 발견하여 기여하게 된 것이다. 특히 오픈소스 컨트리뷰톤 멘티에서 시작해서 멘토로도 참여하고 계신 파이썬 코어 커미터 나동희님의 도움으로 좀더 빠른 리뷰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다.

운동

1월부터 힘차게 새로운 선생님과 함께 스트렝스 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는데... 코로나19로 인해 몇달씩 쉬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흔히 '홈트'라고 하는 것을 시도해보았으나 역시 선생님과 함께 하는 것만은 못하다. 결국은 집에 접이식 사이클링 기구와 백익스텐션 기구를 사서 매일 조금씩 하고 가끔씩 산책이나 동네 뒷산 트레킹을 하는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

피아노

하농과 체르니 연습을 다시 조금씩 해보니 갑자기 손가락이 잘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다시 새로운 곡들을 도전해보고 있다. 쇼팽 에튀드 중 보통 첫번째로 많이 연습하는 흑건을 연습하기 시작했는데, 연말 들어 너무 바빠진 일정으로 익숙한 곡 위주로 스트레스를 풀다보니 진도를 별로 못 나갔다. 의외로 예전에 쳐봤을 법한데 안 쳐본 곡으로 베토벤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3악장을 발견해서 대신 그걸 좀 쳐보는 중. 쇼팽 마주르카 중에도 좀 난이도가 낮은 것들을 몇 곡 골라서 새로운 레퍼토리로 편입시켰다.

이제 좀더 높은 수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어떤 연습을 어떻게 하면 될지는 그려지는데, 그걸 실제로 할 시간과 여유를 내는 것이 어렵다. 어쩌면 여전히 손에 놓지 않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치

나는 되도록 온라인(특히 SNS) 상에서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안 하려고 하는 편인데, 항상 양쪽의 주장을 들어보면 다 나름대로 그럴 듯해보이는 부분도 있고, 이걸 내가 본격 공부해서 판단하자니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는 부분도 있고, 행운이라 해야 할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어떤 첨예한 이슈가 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내가 본업으로 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아서 그런 부분도 있다. 다만 몇가지 느끼는 점들은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 특정 인물이나 특정 조직에 대해 지나친 믿음 내지는 지나친 팬덤을 형성해서 어느 순간 합리적 판단보다는 내편이니까 옳다는 식의 전개가 너무 많이 일어나는 것이 사회 전체로 봤을 때 별로 긍정적인 신호는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인터넷이라는 의사소통의 장이 발전해오는 과정을 보면, PC통신에서부터 블로그, 그리고 이제는 비디오 스트리밍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불특정 다수의 대중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의 기술적 성능과 다양성은 증가하였지만, 오히려 휘발성과 감각적 자극이 세지고 나에게 편하게 들리는 정보의 취사선택을 하고자하는 유혹과 알게 모르게 그렇게 하기 쉬운 기술적·도구적 경향성이 더욱 강해져왔다. 따라서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곱씹어보는 형태의 논의를 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현재 정부의 여러 정책과 그에 대한 성과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의견이 많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떤 이상향을 생각하고 그러한 제반 조건이 다 만족한다고 가정한 상태로 중간과정에 대한 고려 없이 정책적 실행에 옮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즉, 현실의 상황과 목표로 하는 이상적 상황 사이에서 어떤 의사결정에 의해 직간적접으로 여러 사람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영향과 시간적 비용적 물리적 제약을 고려하여 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밟고 지나가야 하는 중간 상태들이 있는데, 그러한 중간 상태를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떻게 밟아나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행하기보다는 최종 상태만을 생각하고 당장 어떤 규칙과 규제를 정한다는 느낌이다. 이상적 목표조차도 사회적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은데, 실행 과정은 이미 모두가 거기의 동의한 것을 넘어서 이미 모든 사회적 물리적 필요조건들이 다 충족되었다고 가정하고 하는 것만 같다. (물론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나마 그렇게라도 해야 뭔가 변화를 이룰 수 있고 방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선출직 고위정치인들의 임기가 짧아서 그 안에 뭔가 보여주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이익집단의 논리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직 우리사회가 그 정도로 성숙한 논의와 의사결정을 하기에는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다들 여유가 없고 급해서 그런 것인지, 이전 정부들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런 것인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코로나19

당장은 모두에게 나름대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지만, 이를 계기로 mRNA 백신이라는 전염병에 대항하는 새로운 무기를 인류가 손에 쥐게 되었다. 앞으로 유사한 팬데믹이 반복될 경우 지금보다 빠른 대처가 가능할 것이라 예상된다. 불안정한 mRNA 분자를 안정화시키고 포장하는 다양한 기술 발전에 힘입은 것인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신속하게 과학적 해결책이 나오는 와중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는 사태 대응에 한계점을 노출하는 것을 보면서 과학에 대한 투자나 사회적 관심이 앞으로 높아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이 실물경제의 파국을 막기 위해 엄청난 유동성을 공급하였는데, 2021년 들어 백신접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어느 정도 터널의 끝이 보이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예측들이 있다. 이에 따라 화폐가치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바, 인플레이션을 따라잡기 위해서 재테크의 비중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은 내년 회고를 쓸 때쯤이면 어떤 상황들이 벌어졌는지 혹은 벌어질 것인지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2021년을 맞이하며

2020년에는 하늘에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인공지능 로봇의 시중을 받고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2020년 도쿄 올림픽과 쇼팽 콩쿨이 연기될 정도였다. 그래도 민간우주여행 시대가 개막했고, ARM칩 기반의 맥 컴퓨터가 출시되어 인텔 기반 맥의 성능을 쌈싸먹는 등 인류는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 2021년에는 어둠의 터널을 지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사회적으로 이런 일이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점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