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Con US 2024 후기

by Joongi Kim

올해도 PyCon US를 다녀왔다. 이번에는 발표가 선정되지 않기도 했고, 장소가 피츠버그로 바뀌어서 아직 한번도 못가본 미국 동부 여행도 겸하여 아예 장기 리프레시 휴가로 다녀왔다. 작년에는 aiomonitor 관련 발표도 하고 asyncio.TaskGroup API 개선을 제안하는 등의 뭔가 개발 측면에서의 목적을 가지고 갔으나, 올해는 그런 직접적인 기여보다는 내가 계속 이 커뮤니티의 일원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피츠버그

작년에 갔던 솔트레이크시티는 고산지대의 건조한 사막 기후였는데, 이번에 간 피츠버그는 완전 초록초록에 약간 한국의 강원도하고도 비슷한 느낌의 지형과 식생을 갖고 있었다. 마침 바로 직전에 아부다비로 출장을 다녀온 터라 만연한 초록색이 더욱 반가웠다. 파이콘 기간 동안 하루는 맑고 쨍쨍하다가 하루는 흐리고 비오다가 반복하면서 변화무쌍하게 다양한 날씨의 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일행들과 하루 짬을 내어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도 둘러보고 하인츠 박물관과 카네기 사이언스센터도 구경했는데, 생각보다 피츠버그가 일찍부터 석탄·철강·유리공업이 발전했던 산업도시의 면모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PyCon 메인 세션

이번 파이콘에서도 코어 기술은 faster CPython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PEP-734 subinterpreter와 PEP-703 free-threading (nogil) 관련한 내용들이 중심으로 다루어졌다. PyCon JP에서 만나 노래방까지 같이 가며 친해졌던 Anthony Shaw의 "Unlocking the Parallel Universe: Subinterpreters and Free-Threading in Python 3.13" 세션에서 subinterpreter와 free-threading의 성능 비교를 통해 어떤 trade-off가 있는지 보여주기도 했고, Yury Selivanov의 "Overcoming GIL with subinterpreters and immutability" 발표에서는 subinterpreter를 사용할 때 파이썬 객체들을 서로 다른 인터프리터 인스턴스 간에 효율적으로 공유하기 위해서 변경이 불가능하되 HAMT를 이용하여 기존 객체의 변경 없이 변경이력을 추가해나가는 방식으로 동작하는 (참고로 contextvars도 이런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다) immutable dict 구현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나중에 몇몇 코어개발자들과의 식사모임에서 듣기로는 Guido가 immutable list를 구현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 외에도 파이썬의 인터프리터 실행속도를 높이기 위한 연구로 Brandt Bucher의 "Building a JIT compiler for CPython" 발표도 재밌었는데, copy-and-patch compilation 기법을 통해 바이트코드 명령어에 대응하는 미리 작성된 machine code를 말 그대로 '복붙'하여 이어붙이는 방법으로도 꽤 괜찮은 성능을 내면서 구현이나 유지보수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은 방식으로 JIT을 구현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JIT이 막연히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이라고만 생각했었으나 이런 방법이라면 충분히 커뮤니티 수준에서 시도해볼만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이기도 한 observability pipeline 관련해서는 Pablo Galindo Salgado의 "Profiling at the speed of light" 발표가 흥미로웠는데, Linux 커널에서 제공하는 프로파일링 유틸리티인 perf를 Python 코드에서도 동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trampoline 역할을 하는 C stack frame을 특정한 형식의 심볼 이름 패턴을 갖도록 생성하여 Python 코드도 C stack frame과 동일하게 성능 측정이나 트레이싱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 외에도 파이썬 자체에 대한 발표라기보다는 파이썬을 활용한 사례를 다루는 발표들도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건 Alastair Stanley의 "Computational Origami"이었다. 2차원 평면의 점들을 특정한 방법으로 계산된 직선으로 평면을 접었을 때, 접은 결과에 따라 놓여진 점들의 좌표들이 갖는 특성을 이용해 임의의 고차방정식을 풀 수 있는데(사실 나도 수학적으로 어떻게 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을 파이썬 코드로 그대로 표현하는 라이브러리를 개발하여 소개하였다.

PyCon 오픈스페이스

이전에도 파이콘 후기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사실 파이콘의 백미는 주제별 토론방인 Open Space다. 너무 재밌는 방들이 많았지만 분신술을 쓸 수는 없었기에 몇개만 들어가볼 수 있었는데,

  • 소프트웨어 테스팅에 대한 경험과 고민은 나누는 "Software Testing" 세션
  • 각자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AI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 있는지 공유하는 "Internal AI Tooling" 세션
  • 요즘 파이썬 툴링에서 핫한 Ruff, uv 등을 개발하고 있는 스타트업인 Astral의 AMA 세션
  • 10년째 이어오고 있다는 Ned Batchelder (@nedbat)님의 저글링 연습 세션

을 들어가보았다.

소프트웨어 테스팅 세션에서는 통합 테스트의 중요성, mocking이나 test data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테스트를 어떻게 도입하고 사용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간에 RailsConf에서 봤다는 Implementing a Strong Code-Review Culture, Philosophy of Software Design 같은 유용한 정보들도 소개받을 수 있었다. 특히 소프트웨어 개발은 사전에 그 기간과 투입노력을 예측하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 문제를 다룬 Software Estimation - Demystifying Developer Practices 같은 책도 언급되었다. 특히, 이 세션에서는 끝나고 각자 연락처를 종이에 죽 적어서 공유하고 참여자였던 어느 대학 교수분이 따로 구글닥스로 미팅로그를 정리해 공유해주셔서 좋았다.

Internal AI Tooling 세션도 재미있었는데, 각자 회사에서 ChatGPT 같은 AI 서비스를 어떻게 업무에 활용하고 있는지 공유하고, 파인튜닝을 실제로 얼마나 유용하게 쓰고 있는지, 내부적으로 이런 AI 도구들을 통합해서 사용하는 인하우스 솔루션 같은 게 있는지도 논의하였다. 예상대로 ChatGPT나 GitHub Copilot은 많은 곳에서 활용하고 있었고, 우리회사처럼 자체 챗봇 포탈을 만들어 여러 백엔드를 바꿔가며 쓴다거나 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곳은 아직 소수였다. 사내 문서 저장소 같은 걸로 LLM을 파인튜닝할 때, GPT-3.5에 파인튜닝을 결합한 게 가장 좋고 그 다음으로 GPT-4에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그 다음이 GPT-3.5에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하는 순으로 잘 동작한다는 이야기가 재미었었는데, GPT-4의 경우 비용 문제를 고려해야 해서 결국은 GPT-3.5에 적당한 수준의 파인튜닝이 가장 낫더라는 회고를 공유받았다.

Astral 개발사 세션에서는, 단골 메뉴로 '도대체 Astral은 비즈니스 모델이 뭔가요?'라는 질문이 나왔다. 요즘 파이썬 생태계에서 나름 핫한 개발도구들을 오픈소스로 개발·공개해서 사람들 관심은 많은데, 투자는 받았다고 하지만 도대체 무엇으로 돈을 버는가 다들 궁금해했다. 만들어낸 도구들의 사용 경험은 좋은데 다들 이 도구들의 지속적으로 미래에도 잘 유지보수가 될지 걱정하는 느낌. 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는데, 특히 작년에 Pantsbuild의 개발사였던 toolchain.com이 문을 닫고 완전 커뮤니티 프로젝트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Pantsbuild 프로젝트는 핵심 개발자들 대부분이 각자 다른 회사로 이직한 후에도 나름대로 열심히 참여하고 있어서 비교적 유지보수가 잘 되고 있지만, 지속성에 대해서는 걱정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 OST 세션뿐만 아니라 코어 개발팀 모임(Astral 개발자 중에 CPython 코어 커미터인 분도 있음) 등에서도 너무 똑같은 질문을 많이 받아서 제발 그만 물어보라고 했다는 후일담도 있었다.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뭐였냐면... 사용자들이 충분히 좋아하는 도구를 만들면 뭔가 비즈니스 모델이 생기지 않을까? 정도 수준의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파이썬 개발자 수가 아주 많은 큰 조직(Microsoft나 Google 정도 되는)에서 필요로 하는 특화된 무언가를 만들 것이고 연말쯤에는 뭔가 공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언급도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에는 힘들어보였다. 이건 미국이라서 가능한 것인가 싶기도 한데, 일단 사람들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만들면 투자도 받고 뭔가 어떻게 되겠지 하는 긍정(?)의 마인드인가 싶기도. 하지만 9년차 스타트업의 공동창업자인 나로서는 아무리봐도 불안해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글링 연습 세션에서는 영근(@scari)님께서 드디어(!) 10년 만에(...) 저글링을 터득하셨다며 내게 열심히 설명해주셨는데... 아직 내게는 어려웠다. 처음부터 바로 공 3개를 돌리는 게 아니라, 공 1개를 위로 던졌다 받았다 하는 것을 먼저 안정적으로 연습하고, 그게 되면 공 2개를 한 손에 쥐고 그 중 공 1개만 던지고 받고, 그게 되면 첫번째 공을 던지고 나서 타이밍 맞춰 두번째 공을 던지고, 그게 되면 두번째 공을 던진 후 첫번째 공을 다른 손으로 받는 연습을 하고, 그게 되면 비로소 공을 하나 더 추가하는 식으로 나름의 연습 단계가 있었다. 나는 공을 던질 때 수직으로 제 자리에 돌아오게 던져야 하는데 자꾸 멀리 던져버려서 주우러 다니다가 체력 고갈로 실패. ㅋㅋㅋ ㅠㅠ

스프린트

작년에는 aiomonitor-ng로 직접 스프린트를 열었다가 aiomonitor 메인테이너가 되면서 Sviatoslav Sydorenko (@webknjaz)님으로부터 CI 파이프라인 구성법에 대한 특훈(?)을 받았다. 올해는 aiomonitor와 aiodocker를 모두 다루기 위해 aio-libs로 스프린트를 열었다. 두 분의 참가자가 있었는데, 한분은 (알고보니 동갑내기였던 데다 이번 PyCon US 발표자이기도 한) Junya Fukuda (@jrfk)님이었고, 다른 한분은 시카고 지역 파이썬 커뮤니티 organizer인 Heather White (@eevelweezel)님이었다. 이번 스프린트의 주요 목표는 aiodocker의 CI 파이프라인을 현대화한 것인데, Junya님은 린팅 도구를 Ruff로 갈아타는 과정에 기여하셨고, Heather님은 로컬 환경에서 테스트 돌릴 때 클린업 이슈 및 로컬 Docker 데몬이 다른 애플리케이션과 공유되고 있을 때 테스트가 뻑나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고 스프린트 종료 후에도 Hatch 기반으로 릴리즈 파이프라인 업데이트하는 등의 기여를 진행하고 있다. 마침 한국에 돌아오고 나니 회사에서도 aiodocker를 살짝 고쳐야 하는 이슈가 생겼는데, CI 파이프라인을 싹 손봐둔 덕분에 리뷰가 쉬워져서 다행이다.

필라델피아

파이콘이 끝나고 나서는 일주일 간 동부 여행 일정을 잡아두었다. 먼저 비행기를 타고 피츠버그에서 필라델피아로 이동하여 시내 구경을 좀 하고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기인 준호네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동기 중에서는 가장 빨리 결혼한 친구라서 이미 내 조카뻘 되는 아들도 둘이나 있는데, 와이프 분은 한국에서 몇번 만났지만 아이들은 이번에 처음 보았다. 첫째 녀석과 백만년 만에 장기도 두고(내가 이기긴 했지만 매우 잘 했다), 준호랑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준호의 부탁(?)으로 요즘 연습하고 있던 슈만의 '헌정(Widmung)' 리스트 버전도 아이들에게 연주해주었다. 와이프 분께서 푸짐한 쭈삼불고기와 파전을 해주셔서 너무너무 맛있게 먹었다. :) 회사 근처 카페에서 사간 원두도 알고보니 라떼 매니아셨던지라 너무 맘에 들어하셔서(실제로 나도 마셔보니 너무 맛있었음.. 심지어 그 카페에서 먹는 것보다...) 좋았다.

필라델피아는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가본 건 처음이었는데, 미국 초기 역사의 중심지인데다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오는 바닷길 때문에 일찍부터 산업·공업이 발달한 도시여서 서부(실리콘밸리, 라스베가스 등)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미국에도 뭔가 고밀도의 아기자기한 '도심'이라는 것이 있었구나 싶은 느낌. 내가 그전까지 알던 미국 도시들은 대부분 자동차 아니면 이동이 불가능한 교외 지역의 단독주택 단지와 큰 단층 쇼핑몰, 그리고 다운타운에 큼직큼직한 블록으로 메꿔진 고층빌딩들(그 사이를 걸어다니기에는 뭔가 매우 썰렁한)이었는데, 장기간에 걸쳐 오랫동안 인구밀도가 높게 유지되면서 자연스럽게 저층~중층의 상업·주거 시설들로 가득차서 거리 하나를 지날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느낌의 미국 도심은 처음이었다. 자유의 종이나 독립선언서 낭독했다는 집도 구경하고, 미국 독립전쟁 역사를 다룬 박물관도 구경하고... 미국이 역사가 짧은 만큼 뭔가 관련 유적이나 유물에 큰 의미부여를 하면서 정성껏 관리하고 알린다는 인상이었다.

뉴욕

준호네 집에서 하루 묵은 뒤 트렌턴에 가서 뉴저지를 통과하는 열차를 타고 뉴욕으로 이동하였다. 무사히 열차를 잘 잡아타고 가나 했는데, 웬걸 중간에 갑자기 30분 동안 서더니 뉴저지 펜 역에서 다 내리고 다른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그래도 작년 독일 출장 때처럼 아예 다른 역에 가서 갈아타야 하는 정도 수준은 아니었고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하는 정도였다.

휴가로 간 것이기도 하고 뉴욕은 나중에도 또 올 수 있겠다 싶어서, 엄청 빡빡하게 일정을 짜서 돌아다니지는 않고 하루에 2~3개 정도만 대략의 목적지를 정하고 주로 많이 걸었다. 대충 기억나는 걸 적어보자면... 타임스퀘어, 센트럴파크, 미술관(MoMA, 휘트니, 메트로폴리탄), 9.11 메모리얼과 박물관, 월스트리트, 자유의 여신상, 카네기홀, 허드슨야드 전망대, 하이라인, 리틀아일랜드, 첼시마켓, 덤보와 브루클린교 정도? UN 본부도 생각은 했었는데, 제대로 투어하려면 사전 예약을 해야 해서 이번에는 못갔다. 치안은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라 그런지, 번화가에는 24시간 하거나 새벽 늦게까지 하는 상점이나 식당, 베이커리들도 많고, 미드타운 중심가는 그냥 사람이 24시간 많아서 오히려 안전한 느낌이었다. 다만 지하철은 여러 시간대 걸쳐 이용해보니 낮에는 괜찮은데 밤 10시 넘어가면 간혹 난동(?) 부리는 취객이 있어서 늦은 시간에는 피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UN 본부가 있는 뉴욕이 세계의 수도라고도 하고 모든 인종의 멜팅팟(melting pot)이라고도 하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는데, 직접 가보니 과연 그러했다. 도착한 첫날은 호텔에 짐을 풀고(원래 예약한 방에서 업그레이드하는 옵션을 사전에 이메일로 알려줘서 신청했다가 이게 적용되지 않아 프론트데스크에 문의하니 높은 층의 방으로 바꿔줬는데 도심 뷰가 좋아서 맘에 들었다. 뭔가 미국을 포함해서 서구권에서는 안 될 것 같은 것도 일단 요청해보면 뭔가 옵션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냥 특별한 목적지 없이 한인타운 근처의 호텔부터 타임스퀘어를 거쳐 센트럴파크의 베데스다 계단까지 주우우욱 걸었다. 일단 뉴욕의 도시 스케일을 느껴보기 위함이었는데, 특히 규칙적인 크기(180m x 76m 또는 600ft x 250ft)의 격자로 구성된 미드타운 지역은 어렸을 때 책으로만 보았던 "avenue"와 "street"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특히 남북 방향으로 뻗은 애비뉴나 대각선 브로드웨이를 따라 걷다보면, 각 스트릿들이 갖고 있는 특색을 짧은 시간에 비교적 압축적으로 볼 수 있고, 스트릿 자체가 폭이 좁은 일방통행 2-3차선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여차해서 자동차가 오지 않으면 그냥 무단횡단을 해도 심리적으로 부담이 없는 너비여서 굉장히 보행자 친화적인 도시라는 인상이 들었다. 타임스퀘어는 뭐 영상이나 사진으로 많이 봤지만 실제로 가보니 그야말로 모든 브랜드의 향연장이라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여기에 광고판이든 상가를 내려고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브랜드들이 경쟁하는 거 아닐까 싶은 모습이다. 그러다가 좀더 걸어서 55번 스트릿 정도 오면 갑자기 숲이 보이기 시작하고 59번 스트릿을 기점으로 센트럴파크가 펼쳐지는데, 굉장히 빽빽하게 건물들이 들어서있는 미드타운에서 센트럴파크를 마주할 때의 장면전환은 정말 힐링되는 기분이었다.

미국 가면 항상 뭔가 음식들이 맛은 떨어지고 양은 많고 그래서 별로 행복하지 않았(?)는데, 뉴욕은 과연 세계의 수도답게 다양한 나라의 음식들을 심지어 원래 그 음식들이 유래한 곳들보다도 맛있고(그리고 비싸게...) 먹을 수 있었다. 길가다가 그냥 눈에 띄어서 들어간 에스프레소 바도 맛있었고, 미술관들에 붙어있는 카페들도 좋았고, 북창동순두부도 맛있었고, 마지막 날에 지인 추천으로 간 칵테일바도 좋았다. 돈만 있다면 그냥 언제든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내가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항상 아쉬운 것이 '아이스 라떼'를 맛있게 하는 곳이 별로 없다는 점인데, 미국은 skimmed milk를 써서 우유가 묽어서 맛이 없거나 혹은 에스프레소가 아닌 묽은 brewed coffee에 우유를 타다보니 맛이 없거나 하고, 유럽은 일단 커피를 얼음을 넣어서 차게 마신다는 개념 자체가 잘 없다. (유럽에서는 그래서 우유와 얼음컵과 에스프레소를 각각 따로 주문해서 내가 조합해서 마시는 게 그나마 가장 원하는 맛에 가깝게 나온다.) 놀랍게도(?) 뉴욕의 카페들은 비교적 아이스 라떼를 아이스 라떼답게 만들어주었다.

9.11 메모리얼은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 안으로 쏟아지는 폭포 형태의 조형물을 해놓은 것은 대충 사진으로 많이 봐서 알고 있었지만, 함께 조성해놓은 박물관은 따로 이야기를 못 들었었는데 생각보다 매우 인상깊은 공간이었다. 중학교 때 집에서 저녁 뉴스를 보다가 뉴스속보 자막이 뜨더니 두번째 비행기가 충돌하는 것과 결국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았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구 다른편에 있었던 나도 그랬는데 이 일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뉴욕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재작년 댈러스의 JFK 메모리얼을 갔을 때도 느꼈지만, 미국인들은 정말 메모리얼 만드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사건을 기억하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것이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가 하는 메시지 자체를 예술과 건축으로 승화시킨다는 느낌. 대체로 이러한 사건들 자체는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것들이지만 집단치유의 한 방법으로 이런 엄청난 메모리얼들을 만드는 것은 대단하고 또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9.11 메모리얼은 점점 지하로 깊이 내려가면서 실제 세계무역센터의 기초 기둥이 있는 바닥 레벨까지 가는데, 이 과정에서 두 무역센터 건물의 실제 위치가 아주 거대한 화강석 매스로 만들어져있고 그 사이를 돌아내려간다. 중간에 푸른 하늘색의 종이 카드가 잔뜩 붙어서 그 절망과 슬픔에 대비되는 하늘빛을 표현하기도 하고, 허드슨 강 근처에 지은 건축물이다보니 지하수가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건설한 차수벽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각 무역센터의 매스에 해당하는 지하공간은 희생자들의 사진과 테러사건의 전말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며 다양한 사료들을 모아둔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이 전시관들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중간중간에는 건물이 무너지며 구부러지고 휘어진 철근 구조물이나 당시 사용된 소방차 같은 것이 전시되어 있다. 나중에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당시 소방관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희생되었는지 들었기에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었다.

카네기홀은.... 정말정말 운 좋게도 한달 전쯤 Evgeny Kissin의 피아노 리사이틀 표가 무대 중앙 앞자리에 한장(!) 딱 남은 걸 발견해서 예약한 것이었는데, 너무너무 좋았다. Pre-concert dining이라고 해서 공연홀 옆의 식당에서 콘서트 예매자들만 예약할 수 있는 코스 요리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것도 대성공. 물론 꽤 비싼 식사이긴 했지만, 돈 벌어서 어디다 쓰나 했을 때 바로 이런 곳에 써야겠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문화생활을 마음만 먹으면 거의 매주 매달 즐길 수 있는 뉴욕 시민들이 부럽기도.) Kissin의 공연은... 뭐 명불허전. 이제 50대가 넘어간 중년의 피아니스트임에도 여전히 파워풀했다. 초반 연주는 워밍업하느라 그랬는지 다소 힘이 빠진 느낌이 있었는데 후반부의 브람스와 프로코피예프 곡들은 피아노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옆자리에 혼자 온 동양인 남자 관객분이 한 분 더 있었는데, 인터미션 때 이야기해보니 뉴욕에 20년째 거주하며 다양한 무역 사업을 하고 있는 일본 분이었다. 종종 카네기홀에 피아노 공연 보러 온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되었다.

사실 미리 작품 목록을 찾아보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의외로(?) 고흐의 별 헤는 밤이나 자화상 같은 완전 초유명한 작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걸려있었던 미술관들도 좋았다. (물론 그런 유명한 작품들 말고 MoMA에 걸려있던 다른 작품들도 마음에 드는 게 많이 있었다. ㅋㅋ) 딱 하나 미리 찾아봤던 것은 휘트니 미술관에 있다는 Alexander Calder의 Big Red라는 모빌 작품이었는데, 이번에 갔을 땐 다른 특별전이 진행 중이라 전시를 안해두어서 아쉬웠다. 이걸 찾아본 이유는 전산과 전공생이라면 모두 아는 바로 그 Introduction to Algorithms 책의 표지에 나오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는 정말 기대하지 않았다가 발견한 보석이 있었는데 바로 Frank Lloyd Wright의 아메리칸 대평원 양식으로 만들어진 개인주택 거실을 그대로 옮겨와 재현한 방이었다. 작년에 일본에 갔을 때 운 좋게도 제국호텔 라이트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국호텔 로비 한켠에 마련된 특별전시를 인상깊게 보았는데 여기서도 그의 발자취를 발견해서 좋았다. 몇몇 건축물이나 건축가들을 보면 관점에 따라 시대를 초월한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나한테는 라이트의 건물들이 그렇고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그렇다. 라이트의 작품이나 조형 언어들은 의외로 영상화된 SF 작품들에서도 많이 등장하는데 예를 들면 얼터드카본, 웨스트월드, 블레이드러너 정도를 들 수 있겠다.

가장 마지막으로 갔던 덤보와 브루클린교는 좋은 마무리를 선사해주었다. 너무 화창한 날씨에 일부러 해질녘쯤 다리를 건너야겠다 싶어서 일정을 맞췄는데, 딱 그때부터 날씨가 흐려지면서 맨해튼의 고층건물들 꼭대기가 모두 구름에 싸여있는 나름 진기한 풍경도 볼 수 있었다. 약간 영화에 나오는 그런 느낌... 여기에 칵테일바 가서 레몬 베이스의 상큼한 칵테일 몇 잔 마셔주고 알차게 마무리했다.

마지막에 돌아올 때는 JFK 공항을 이용했는데,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에로 사리넨 건축가의 TWA Hotel (원래는 TWA 전용 터미널이었으나 현재는 호텔로 리모델링됨)도 가볼 수 있었다. 이것이 과연 1960년대의 미래 감성인가. 오히려 지금의 하이테크 건축물들에서는 보기 어려운 곡선과 미래적인 느낌. 이 건축스타일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면 아마도 그것은 마블의 로키 드라마에 나오는 타임키퍼들의 오피스 공간일 것이다. 혹은, 맨인블랙에 나온 지구본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비행기가 대형화하고 여객 수요가 늘어나면서 사용하지 않게 된 터미널이라 헐릴 뻔했다가 호텔로 리모델링된 것인데, 이거는 정말 잘 보존해둔 것 같다.

새로운 미국의 발견

2019년과 2022년 말 ~ 2024년 초까지 미국 출장을 밥 먹듯이 갔더래서 이제 미국은 익숙하구나 싶었는데, 이번 파이콘 참석과 동부 여행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 기분이다. 뉴욕은 갔다온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벌써 다시 가서 뭔가 못다해본 것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이번에는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소호라든지 차이나타운도 좀더 탐색해보고 싶고, UN 본부도 투어 신청해서 가보고,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 뉴욕 지점이라거나... 좀더 제대로 된 맛집이나 바도 가보고 싶고. 벌써부터 내년 파이콘 US를 위해 돈을 부지런히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ㅋㅋ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