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블로그는 거의 반년에 한번 정도 쓰는 것 같다. 이제는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것조차도 '일'로 느껴질 때가 더 많은데 이런 게 나이먹는 게 아닌가 싶어 서글프기도 하면서도, 미디어 소비 말고도 나를 필요로 하는 다른 할 일이 많다는 점에서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래블업은 이제 창업 6년차가 되었고 인원은 20명이 되었다. (2019년 회고글에서 10명이 되었다고 했으니 2년 동안 두 배 커졌다.) 코로나19라는 상황 속에서도 2년 연속 손익분기를 넘었다. AIOps, MLOps 솔루션을 만드는 국내외 회사는 많지만, 그들 중에서 AWS나 Google 같은 세계구급 회사가 아니고서야 순수 소프트웨어 솔루션 판매만으로 이익을 내고 있는 회사가 전 세계를 기준으로 봐도 아마 많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조직이 성장하면서 동시에 나 자신도, 또 구성원들도 그 성장을 쫓아가기 위해 다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이익을 내고 있는 독자기술 MLOps 플랫폼을 가진 회사를 일궈냈다는 점 하나만큼은 자랑해도 되지 싶다. 그에 필요한 핵심기술들이 한국·미국·일본에 등록 특허가 된 것도 올해다. 아마도 회고글을 쓰면서 내 자신에게는 처음 말하는 것 같다. 수고했다.
사실 올해는 시작부터 참 힘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심한 번아웃과 우울증 증세가 와서 정신과 상담을 받아봐야 할 것 같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도 했을 정도다. 울회사 COO이신 김정묵님과 신정규님이 생활 환경을 바꿔보는 게 좋겠다는 제안을 주셔서, 2년 동안 8명 대가족이 함께 살던 본가를 나와 3월부터는 회사를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역삼동에 독립 살림을 차렸다. 어느 가족보다 가족끼리 사이가 좋다고 자신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동굴 같은 것이 필요하다 싶었다. 또 가족끼리 부대껴 살다보니 회사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을 너무 안 만나게 되는 것 같아 일부러 좀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전부터 봐두었던 패스트파이브의 공유주거 실험 버전(?)인 라이프온투게더라는 오피스텔을 선택하였다. 무엇보다 너무 심리적으로 지친 상황에서 부동산과 씨름하고 집 알아보러 다니고 이런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패스트파이브와 계약하고 입주날짜만 맞추면 끝나는 부분이 맘에 들었다. (대신 그만큼 직접 발품팔아 찾아내는 집들보다는 좀 비싸긴 하다.) 또한 코로나19로 제약은 있었지만, 입주자들끼리 서로 자연스럽게 만나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있어서 공연이나 전시를 같이 보러 가기도 했는데, 어느 정도 기대했던 바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이런 경로로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게 삶에 꽤 큰 활력소가 된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공식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이런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만나 알게된 사람들을 통해 입주 멤버들끼리 자체적으로 꾸린 독서모임인 '북적북적'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랑 비슷한 또래(30대 중후반)이면서 사회·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그 중에서도 IT 분야 사람들도 많다 보니 각자 살아온 이야기 나누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다. 작지만 나만의 공간을 조금씩 내가 고르고 구입한 물건들로 채워가는 재미도 있고, 항상 부모님이 사주시던 옷을 내가 골라서 사입는 것도 재미가 있다. 학생 때는 엄두내기 어려웠던 가격의 물건들을 온전히 나를 위해 지르게 되면서 경제적 풍요를 즐기는 방법도 배우는 중이랄까. (어지간한 자동차 같은 것도 마음만 먹으면 지를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차는 내가 굳이 새로 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 전기차 2세대가 나오길 기다리며 보류 중.) 이런 다양한 변화를 통해 어느 정도 번아웃과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올해는 개발이나 엔지니어링 관점에서는 내가 많이 성장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대신 개발작업을 주니어 엔지니어들에게 나눠주고 위임하는 것이 조금은 더 익숙해진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내가 회사에 병목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가 제일 큰 고민인데, 아직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5년 가까이 거의 혼자서 설계하고 만든 코드베이스이다 보니 코드리뷰를 위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제 회사에 들어온 지 좀 되어서 경험이 쌓인 분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내년부터는 코드리뷰를 2단계로 나누어서 진행한다거나 피어리뷰를 시킨다거나 이런 방법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다만 매니징이라는 것도 여러 스타일이 있고 여러 방법과 분야가 있어서, 내가 잘 하는 부분이 뭔지 스스로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점점 나이를 먹으며 포기하게 되는 부분이 많아지며 드는 생각인데, 어차피 다 잘 할 수는 없고, 그나마 잘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거라도 효과적으로 하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내가 만든 코드와 제품으로 여러 사람의 생계가 걸리는 입장이 되다보니, 매니징이라는 관점에서 내가 스스로 너무 모르는 게 많다는 불안감에 좀 시달려온 측면이 있는데, 그냥 '이런' 상사를 만난 것이 너네 복이자 운이다- 라고 퉁쳐버리는 게 어쩌면 나한테도 또 주니어들한테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아직 정답은 모르겠다.
아직 회사는 어느 정도 안정화된 궤도에 올리기까지 더 많은 고비가 남아있지만,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 경제적 풍요를 얻고 나니 몇 가지 삶에서 달라지는 인식들이 있다. 나와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논문을 쓰고 학회에 가는 근본적인 동기이기도 할 테지만, 꼭 그런 학문적 맥락이 아니더라도 취미생활이나 전시나 공연 같은 걸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어찌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PyCon US에 꼭 무슨 발표를 하지 않더라도(KR/APAC으로 발표도 7년 정도 해봤더니 뭐 더 욕심이 안 난다. -_-) 일반 참가자 자격으로 개인 휴가 + 개인 비용으로라도 참가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 io_uring
을 Python asyncio 백엔드로 도입하는 이슈에 관해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데 직접 기여해보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지만 일의 덩어리가 너무 커서 엄두는 못내고 있다. 아마 내가 진짜 경제적 자유를 얻게 되면, 이런 오픈소스 행사들을 좀더 많이 다녀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꼭 뭘 발표해서가 아니라 비슷한 관심사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에너지를 얻는 목적으로. 발표고 뭐고 귀찮다는 이 느낌도 번아웃의 일종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아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길 하다보면 또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 코로나19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절절하게 깨달은 것 같기도 하다.
내년에는 좀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