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역사적인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고, “올해”로 시점을 못박은 종전선언을 준비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공동성명 발표가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다. 한국인에게 거의 자아정체성의 일부로 자리잡아온 휴전 상태라는 굴레와 거의 모든 남자들이 군대에 가야만 하는 그 궁극적인 근거가 드디어 없어질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물론,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을 맺고 육로 왕래가 전보다 쉽게 가능해진다고 해도 당장 병역의무가 사라진다거나 뭔가 백두산이나 개마고원에서 캠핑을 한다거나(...) 하는 일상의 변화가 갑자기 발생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런 일들은 충분한 시간이 지나 상호신뢰가 확보된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특히 기존 김일성·김정일 체제에서도 나름대로 전향적 논의와 선언들이 있었지만 핵시설 사찰과정에서의 갈등과 남측의 정권교체 등으로 계속 합의 이행에 실패해왔던 전력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김정은이 믿어도 되는 인물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래도 이번에는 좀더 믿고 가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우선, 남북의 경제적 수준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와중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한반도의 상황은 북한이 언제까지고 군사 국가로 남아있게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강력한 경제 제재와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 성과에 대한 필요, 그리고 동아시아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하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결국 북한을 움직인 것이기 때문에, 내 생각에는 합의 이행 과정에서 갈등이나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실패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그래도 좀 높아진 것 같다.
또한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화가 이뤄지면서 가장 궁극적인 전쟁억지력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되었다는 점도 합의의 안정성에 힘을 보탠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앞으로 디테일이 어떻게 갈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비핵화 노선으로 방향을 바꾼 것도 경제력이 곧 진짜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면, 아마 앞으로 일방적으로 합의를 뒤집는 일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단기적으로 봤을 때 독재를 유지하며 본인이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도 북한 전체의 경제 성장은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미 개성공단을 통해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학습이 어느 정도 이뤄진 상태라는 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오히려 이 관점에서는 현재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가장 큰 리스크는 남측의 정권교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최종적으로 진정한 통일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남북 정치 체제의 통합이 필요할 텐데, 앞으로 얼마나 먼 또는 가까운 미래의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북한이 개혁 개방 노선을 채택하더라도 독재 체제를 어떤 방식으로 유지하려고 할지, 혹은 민주정으로의 전환을 어떤 식으로 연착륙시키려고 할지가 나는 더 궁금하다.
2004년 가을 육로로 금강산에 갔던 기억이 난다. 북측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순간부터 펼쳐지는 나무 한 그루 없는 들판과 산이 안타까웠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단풍 속 금강산의 모습과 담백하고 심심하여 입에 잘 맞았던 북한 음식들은 정말 좋았다. 다시 한번 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북한의 경제가 성장하여 북한 산야도 좀더 푸르러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