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함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왔는데, 주보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신부님이 컬럼을 남기셨다.
컬럼의 주제는 "개인주의, 무한 경쟁, 물질론적·자기중심적 세계관을 변화시켜 배려와 사랑, 공존, 그리고 하느님을 중심에 둔 세계관으로 가야 한다"는 가톨릭에서라면 아주 평범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진화론과 과학을 상당히 잘못 인용하고 있었다.
우선 과학을 사상과 혼동하고 있다. "진화론은 인간이 굳이 생겨난 목적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듯 진화론은 모든 것을 자신 뜻대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줍니다."라고 하였는데, 과학은 그 근본이 이유를 찾지 않는 학문이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감각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좀더 많은 현상을 좀더 단순하고 근원적인 법칙과 원리로 설명하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것이지 그러한 법칙과 원리가 왜 그렇게 생겨야만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진화론을 마치 자기중심적 사고의 대표 사례인 것처럼 언급하였는데, 진화론은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제공하려고 했을 뿐 자기중심적인 사고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글 말미에 "진화론을 믿는 이유는 창조주를 배제하여 자립적이고 자존적이 되어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싶은 인간 욕망의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도 상당한 비약이 있는 얘기다. 무신론자들이 진화론을 종교에 대비하여 설명할 때 그런 의도로 진화론을 인용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화론 자체가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전혀 아니다.
게다가 더 너무 나아간 부분은, "진화론은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반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모래가 저절로 시계가 될 수 없고, 무생물이 생명체가 될 수 없으며 원숭이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세계에서 저절로 더 복잡해지는1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열역학 제2법칙에서 말하는 엔트로피는 우주 전체를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주변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킴으로써 자신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람은 모래로부터 유리를 만들 수 있고 기술을 좀더 더하면 시계를 만들 수 있다.2 이것은 당연히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즉, 전역적인 이야기와 지역적인 이야기, 그리고 동작의 주체를 혼동하고 있다. 진화론은 생명체의 진화가 "저절로" 일어난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매우 오랜 시간에 걸친 외부 환경의 변화가 특정 종의 집단에 압력을 줌으로써 확률적으로 조금씩 새로운 환경에 더 적합한 개체가 많아지고 그것이 진화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3 게다가 20세기 말부터 연구되어 온 복잡계 이론에서는 어떤 계를 설명하는 원리가 수학적으로 아주 단순한 구조를 가졌더라도 그것이 여러 스케일에 걸쳐 중첩·반복되면 예측하기 매우 어려운 복잡한 패턴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과학은 세상을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노력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모든 과학기술문명은 내가 만든 것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으면, 똑같은 것을 너도 만들 수 있고 다른 모든 사람도 만들 수 있다는 전제가 성립하기에 가능한 것이며, 그 전제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과학적 방법론이다. 오히려 과학은 인간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기본 가정으로 삼고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이뤄온 과학·기술 발전을 보고 거기 들어간 노력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는 것과 거기에 도취되어 하느님을 무시하고 인간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증하고 비판하면서 자연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할 뿐이다. 오히려 신부님이 지적하셨어야 하는 진짜 문제는 그러한 과학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성취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만을 위해 활용하려고 하는 경우, 장래에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과학연구들을 무분별하게 시도하는 흐름, 지금까지의 과학적 성취만으로 이미 우리가 하느님을 넘어섰다고 자만하는 경우였어야 한다. 진짜 제대로 된 과학자라면, 하느님은 측정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넘어섰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과학이 기존의 사상 체계나 신앙과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검증을 통해 언제든지 기존의 이론이 뒤집힐 수 있다는 가정이며 그것이 뉴턴역학에서 전자기학과 상대성이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강력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지 우리는 이미 지난 수백년간 지켜봤다. 정치에서도 권력 집단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 인류 보편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르네상스 시기 이후 과학적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인간이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본다. 동시에, 신부님의 의도대로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그러한 과학적 방법론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의 문제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여러 문제들은 어떻게 보면 복잡계로서 일부 설명이 가능할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많은 부분을 우연 또는 운명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각자 개인의 경험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motivation은 결국 하느님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좋은 의도로 쓴 칼럼인데, 설명에 너무나 비약과 오류가 많아서 참 안타까운 경우였다. 신자들에게 와닿게 여러 비유를 드는 것은 좋지만 최소한의 논리와 정확성은 지켜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여기서 복잡해진다는 말이 엄밀하게 정의되지 않았는데, 정보량이나 무질서도가 감소하는 것을 복잡해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과 원숭이의 관계에서는 엔트로피의 상대적 비교를 정의하기가 어렵다. 이 경우는 복잡하다는 말을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모래를 유리나 더 복잡한 무언가로 만드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사용하고 이것이 주변에 열에너지 등의 형태로 분산되어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지만, 모래 자체의 엔트로피는 감소할 수 있다.↩
환경 변화는 정말 원래 그 집단이 살던 환경(기후 변화, 천적의 등장 등)이 변해서 일수도 있고, 그 집단이 이주하거나 개체수가 증가하여 새로운 서식처를 찾아나서면서 환경이 바뀌어서 일수도 있다. (이주하지 못하는 고립된 집단이라도 개체수 증감 자체가 충분히 환경 변화의 조건이 될 수 있다.) 만약 환경 변화가 없고 이미 그 종이 그 환경에 충분히 적응한 상태고 그 집단의 유전자 풀이 안정된 상태라면 진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구의 자원이 유한하기에 현실적으로 그러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