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견진성사를 받은 후 처음으로 연구실 후배를 대자로 입교시키게 되었다. 본인이 스스로 신앙을 갈구하여 찾았다거나 내가 먼저 전도한 것은 아니고, 결혼할 배우자가 천주교 신자여서 입교하게 된 경우로서, 내가 대부로서 가톨릭 신앙을 어떻게 소개시켜줄까 고민하다가 내 스스로도 한번 정리해두면 좋겠다 싶어 블로그로 남긴다. 특히 이 친구는 나를 비롯한 많은 카이스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세계관에 익숙하기 때문에, 단순히 무조건 믿어라 하는 것보다는 가톨릭 교회가 어떻게 다르고, 기독교 신앙이 어떤 점이 특별한지, 그래서 이러한 신앙생활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미리 밝혀두지만, 이 글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 생각이기에 가톨릭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교리와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혹시 나보다 더 나은 설명을 할 수 있다면 언제든 의견을 알려주기를 바란다. 이 글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자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 마음 속에 떠오르는 하느님과 신부님과 기도문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다른 것 같아 선뜻 '아멘!' 혹은 '믿습니다!' 하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해주고픈 이야기는, 실제 하느님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는 인간의 한계로 인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다만 우리가 성당에서 접하는 하느님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2천년의 역사를 거치며 일치를 이루고자 노력한 결과라고 받아들이면 좀더 와닿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 왔을까?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동서분열과 종교개혁 등을 거치는 동안, 역사 상 21차례의 공의회가 있었다. 공의회는 교회의 교리와 의식을 일치시키기 위해 소집된 주교와 여러 교회 대표자들의 회의체로, 초기에는 주로 로마 황제들이 로마제국 내 교리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집하였고 이후에는 교황이 새로운 이슈가 나타날 때마다 소집해왔다.
공의회가 교리에 끼친 영향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 기도문이다. 평상시 미사나 기도 때 드리는 사도신경 말고도, 가톨릭에서는 특별한 대축일인 경우나 교구 정책에 따라 미사 때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짧게 니케아 신경이라고도 함)을 대신 바치기도 하는데, 바로 이 니케아 신경을 보면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신앙이 어떻게 구체화하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기독교 초기부터 삼위일체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존재하였고, 여러 차례의 공의회를 거치면서 현재의 로마가톨릭 교회가 인정하는 삼위일체설이 굳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단으로 판정된 다른 교파들은 여러 적대적 정치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가톨릭의 영향이 덜한 곳에 퍼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교리의 합의와 일치 과정은 역사적·과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정치적·신학적 싸움에서 누가 이겼느냐로 볼 수도 있고, 순수한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싸움으로 볼 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든, 인간의 불완전함과 한계로 진리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가정을 따른다면, 여러 교파들을 같은 하느님에 대한 해석적 관점의 차이로 볼 수 있고,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어떤 교파를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나는 결국 그 답은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대자인 후배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결혼하고자 하는 배우자가 가톨릭 신자였고 마침 연구실 선배인 나도 가톨릭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대한민국 국민이며 또한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톨릭 교회의 다양한 지원 덕분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나로서는 대자가 같은 신앙의 토대를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하고 기쁠 따름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한국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조선 후기에 선교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신앙을 찾아나섬으로써 평신도 공동체가 먼저 만들어진 교회라는, 교황청에서도 특별히 인정하는 자부심을 가질 만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수동적으로 문자 그대로의 교리를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 현재 가르침받고 있는 교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좀더 능동적으로 숙고하는 자세가 이러한 자랑스러운 전통의 교회에 발을 들이는 사람으로서 더 어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현재 우리가 배우는 교리가 천년 만년 후에도 정확히 똑같이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성결혼에 관한 이슈를 봐도 그렇듯,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면서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문자 그대로의 성경 해석은 점점 더 위협을 받게 될 것이고 성경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새로운 문제들이 계속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가톨릭, 더 넓게는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에 가지는 의미가 분명히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로서, 하느님이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예고한 대로(구약) 예수님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것(신약)을 믿는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이은 부활이 그 누구든지 예수님의 길을 그만한 고난을 각오하고 따른다면 영생(= 최후의 심판 때 부활)이라는 보답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믿는다. 원래 기독교라는 명칭이 존재하기 전에는, '길'이라고 표현하였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간 길(혹은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고난의 길을 갈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하느님이 예수님을 통해 약속한 구원에 대한 믿음이다. 계시라는 말은, 인간이 스스로 탐구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준 것이라는 뜻이다.
흔히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원인을 2가지 꼽는다면, 첫번째는 성경에 묘사된 여러 신비로운 사건들과 기적들이고, 두번째는 대화 가능한 인격체로서 하느님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첫번째 경우에 좀더 다가가기 쉬운 접근 방법으로 내가 제안하는 것은, 대부분의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 물리적·역사적 사건이었다고 믿지는 못하더라도(특히 구약이나 묵시록 같은 내용들은 나도 신화와 상징에 가까운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예수님의 부활만큼은 믿어보자는 것이다. 설령, 예수님의 부활이 현대의학적 관점의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일시적 혼수/가사상태였는데 당시 의술로는 죽음으로 판정될 만한 어떤 애매한 상황이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부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앞서 있었던 예언들을 실현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기독교의 발원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다른 모든 의심을 덮어버린 증거였던 것이다. 예언자들을 통해 예고되어 실제로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과연 하느님의 계시와 개입 없이 가능했던 것일까? 물론 우연에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자면 그저 삶의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가 그저 우연히 태어나 우연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그러한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번째 경우에는, 하느님과의 대화가 전화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언어적 소통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론 짧은 시간 간격 속에 때론 긴 시간 간격 속에 그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한다. 특히 기도라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소원했을 때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서, 단순히 자신의 특정 이익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동시에 인간적 희생과 노력을 다 해야만 이뤄주신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응답은 하느님의 시간 속에서 하느님의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당장 내일 어떤 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고 응답이 있었어도 오랜 시간이 지나기까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고 심지어 내가 죽은 다음에야 그 응답이 올 수도 있다는 점도 받아들인다면, 조급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는 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그저 우연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의 지식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설명을 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뜻하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내 나름대로의 접근 방법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핵심은 계시에 대한 믿음이다.
과학적 세계관은 그 자체로서 인간이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하기 때문에, 경험의 범주를 벗어난 다른 것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과학은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의 의지로 변화시키는 방법론으로서 아주 훌륭히 기능한다. (적어도 나는 아직까지 이보다 더 나은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과학이 인간의 무지를 인정함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것도 그 무지를 채워나가는 최선의 방법이 객관적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하나의 믿음이다.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의 계시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가톨릭 세계관은 자신과 세계가 그 계시의 일부라고 믿는 것이다. 믿음이기 때문에, 두 경우 모두 그 믿음 자체를 증명할 필요가 없고, 무엇을 믿는지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과학적 세계관이 모든 사람이 원래부터 타고나는 감각적 경험만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더 범용적으로 믿어지기 쉬운 것이다.
다만 나는 두 세계관에 대한 선택이 상호 배타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사건들은 감각적 경험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거나 후대에 조작된 내용이라는 것을 증명 또는 반박하기 어렵기 때문에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유효한 실험 데이터로 취급할 수 없다. (이것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창조과학...)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의 부활만이라도 믿는다면, 그 자체가 계시의 정점을 보여줌(demonstrate)을 느낄 수 있고---신앙은 객관화될 수 있는 경험이 아닌 주관적 경험으로도 충분하기에 느낌으로도 충분하다---그 가르침들을 인간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부분(이것은 무지나 실수뿐만 아니라 인간 의지의 나약함, 그리고 그 총화로 나타나는 사회 현상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을 보완하고 성찰하게 해주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은 인간의 힘을 키워주긴 했지만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까지 알려주진 않으니 말이다.
과학혁명 이후의 사회에서 나타난 여러 변화와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답을 바로 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계시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미 로마제국 시절부터 해석의 논란이 분분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신학자들이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오히려 인류가 그대로 2천년 전의 상태에 머물러있기보다는 계속 고뇌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예수님이 자신은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을 봤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후대의 고민과 실천이 따를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묵상이나 성가 구절 중에 종종 볼 수 있는 표현 중에 하나가, '하느님께 구속되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매우 모순적인 표현인데, 내가 보기엔 이 표현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다면 이미 충분히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욕심을 온전히 내려놓는다는 것, 나의 마음과 감정을 하느님께 내보인다는 것. 나는 이 부분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믿음, 즉 '청정'한 마음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집착을 버리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상태 말이다. 이것은 세상 만물을 어떻게 변화시켜서 이뤄지는 상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도달할 수 있는 상태로, 하느님에게 내 것을 온전히 맡긴다는 신앙 또한 그러한 마음의 주관성---"내가 바로 이렇게 느낀다"는---을 인정하는 순간 그 믿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 가톨릭 신앙은 그냥 믿고 싶다고 해서 공짜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어떻게 '잘' 따를 것인지 고민해야 하고, 또 고민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믿음의 상태를 끊임없이 자각하려고 노력해야만 유지된다.
과학적 세계관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객관성으로 보여지는 동전의 한 면만 보는 것과도 같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될 만큼 지난 5백년 간 과학의 발전은 눈부신 것이었지만, 그 넘쳐나는 힘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졌을 뿐이다. 이미 인류를 먹여살리고도 남을 식량과 재화를 생산할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불평등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 계속 증가하는 복잡도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는 방법 중 하나는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여 자신만의 확고한 주관을 인정하고 가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를 믿는 주관을 가진다면, 비록 신앙인으로서의 역할을 고민하고 수행하는 과정이 고단할지라도,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에 훨씬 거친 상황들을 더 잘 헤쳐나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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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예수님의 길대로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다. 이것을 믿고 안 믿고는 자신의 선택이지만, 이미 이 소식을 접한다는 우연은 하느님이 자신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항상 객관화 가능한 경험 증거만을 바라보던 삶에서, 자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관적 감정을 인정하고 느낌으로서 삶을 더 풍부하게 해보자. 그리고 복음을 통해 신앙인의 삶을 살며 머리뿐만 아니라 마음 속 예수님이 이끄는 길에도 충실하여 평화와 기쁨을 같이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