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호흡기증후군(MERS)로 인해 국내외 불안이 커지고 있고, 연일 뉴스에서는 격리대상자가 몇 명이 더 늘었다느니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오늘 결국 1000명을 넘겼다고 한다.) 2003년의 조류인플루엔자(SARS)와 2009년 H1N1 신종플루 등 여러 차례 호흡기 관련 감염병 위기가 있었지만, SNS 상에서는 정부의 대응에 대한 불만과 우려가 계속 나온다. 특히, SARS 때는 국내에서 확진환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고, 당시 WHO에서도 우리나라 정부의 대응 능력을 높게 평가한 바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는 완전히 헛점을 계속 노출하고 있고 홍콩과 WHO 조차 정부의 정보공개 거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할 정도다. SARS 사태 이후 질병관리본부라는 게 미국의 CDC 개념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왜 그러면 지금은 그때보다 대응을 잘 못하는 느낌을 주는 걸까?
내가 볼 때는, 행정부 내의 전문 인력들이 제때제때 판단하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친 것이 가장 크지 않나 싶다. 분명히 예전보다 정부 내부에 이런 사태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인력이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러한 전문성이 활용되지 못한 원인은 결국 위임과 책임 관계가 흐트러져서가 아닐까? 정부 관료 시스템은 특성 상 책임질 일을 만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각급 관료들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더라도 만약 그 결과가 안 좋을 경우 책임을 크게 져야 한다면 가만히 있으려는 성질이 있다. 게다가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부처와 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움직임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실제 운용되는 부처들의 역할과 범위도 그렇고, 그것들을 정의하는 법 체계도 분명히 실제의 디테일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어딘가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긴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사건일수록 더 큰 파장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이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더 큰 권한과 책임을 가진 사람--예를 들면 장관이나 국무총리 정도 되는--이 아랫사람들을 보호해주면서 대신 책임을 져주는 것이다.
작년의 세월호 사고에서도 정부의 사고 대응·수습 과정을 보아도 그렇고, 지금의 MERS 사태를 보아도 그렇고, 여전히 정부의 각 부분들이 모래알 같이 각각 따로 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직 환자가 없는 걸로 알려진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어떻게든 자기 지역에 환자가 못 들어오게 하려고 안달이고, 교육부와 예비군은 휴교에 훈련 프로그램 조정까지 해가며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하고, 보건복지부는 그런 걸 두고 과잉행동이라고 말하고 있고, 정부는 격리된 사람들이 식사는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질 않나, 대통령은 사태가 터진 지 2주가 지나서야 이게 급한 불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새다. 국민들이 바라는 건 무슨 수퍼히어로가 나타나서 갑자기 모든 일을 천재적으로 다 해결해준다 이런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정부의 각 기관들과 제도들이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조율해주는 행정부 지도자이다. 그 역할을 대통령이 할 수도 있고 국무총리가 할 수도 있고 몇몇 부처 장관들이 할 수도 있고 그런 디테일은 그때그때 정부의 구성이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이제서야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결국 사람들이 가장 만만하게 욕할 수 있는 사람은 대통령이다보니(적어도 우리가 선거로 뽑았으니까) 대통령만 욕을 열심히 먹는 거다.
어떤 사람들은 장관이 경제쪽 인사라 그렇다는 얘기도 하던데, 내가 보기엔 장관 정도 되는 사람들은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경우가 많아서 아무래도 그 부처에서 원래부터 오랜 기간 일해온 공무원들에 비해서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장관을 부처 내부에서 뽑든 다른 곳에서 사람을 데려오든 그런 것은 그때그때 대통령의 스타일에 따라 달라지는 거고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나는 그 자체를 문제삼고 싶진 않다. 다만, 어떤 배경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국무위원이 된 사람이든,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그걸 잘 아는 사람을 찾아서 적절한 권한을 주고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국무위원 정도의 권한과 책임을 가진 사람들을 뽑을 때는, 실질적인 전문성보다도 적절한 위임을 통해 전문가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봐야 하지 않을까? (무슨 회사 CEO 같이 '경영'을 잘 하는 사람을 뽑으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여러 경력을 통해 어떤 조직에서 어떤 어려운 상황이 있었을 때 문제해결의 방법으로 전문가를 찾고 위임하는 결정을 얼마나 잘 해왔는지 봐야 할 것이다) 전문성은 먼저 이 요건이 충족된 다음에 고려해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국회와 청와대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데, 그 의지가 없는 것인지 몰라서 못하는 것인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인지 그게 구분이 안 되니 답답할 노릇이다.
괴담이나 유언비어를 걱정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제도와 전문가들이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조율하고 위임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누군가 보여준다면, 자연스럽게 국민들이 정부를 신뢰하고 따를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그 책임이라는 건 누구누구 사퇴해라 이런 게 아니라, 어떤 조치를 취했을 때 결과가 생각보다 좋지 못하더라도 실제 그 조치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거나 실행한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상위 책임자로서 그 충격을 흡수해주라는 뜻에서 말이다. 그러면 실제 현장의 전문가들이 더 나은 방법과 수단을 좀더 과감하게 강구하고 실행할 수 있게 될 거고, 조직의 경직성과 책임의 범위에 전전긍긍할 때보다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