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블로그에는 일부러 종교적인 이야기를 거의 올리지 않는 편인데, 이번 주일의 신부님 강론이 내가 고민해왔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만든 신앙에 대한 관점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어 기록으로 남긴다. 아마 세월이 좀 흐른 후에 이 글을 돌아보면 초심을 잃지 않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오늘 들었던 강론은 내가 평생 성당 다니면서 들은 강론 중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살짝 설명을 곁들이자면, 가톨릭의 미사는 크게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2단계로 구성된다. 말씀의 전례에서는 구약, 신약, 복음의 일부분들이 낭독되고 성찬의 전례에서는 예수님이 세운 성체성사를 제사로써 재현한다. 보통 그 사이에 20분 가량의 신부님 강론이 들어가며, 강론에서는 보통 그날의 복음을 신부님의 묵상을 곁들여 해설하지만 특별한 날에는 주교나 교황의 메시지를 대신 낭독하기도 한다. 각 미사마다 축일 여부나 가톨릭 전례력에 따른 의미와 주제가 부여되어 있고 성경에서 그와 관련된 부분들이 발췌되어 사용된다.)

오늘 나온 복음말씀은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37절까지의 내용으로, 예수님이 유다인들이 지켜온 율법들을 다시 설명하면서,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하는 내용이었다. (매일미사 참조) 먼저 신부님의 강론 내용을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기억나는 대로 최대한 옮겨보았지만 역시 한 단계 거치는 것이라 본래의 그 감동(?)이 다시 느껴질런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나 잘못 전달하는 부분이 있을까 조심스럽기도 하고.

농부가 씨뿌리는 건 무엇을 믿기 때문일까요? 씨를 심으면 열매가 가득 열리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딛고 서 있고, 지금 이 성당에 들어와 앉아있는 것은 그 땅과 성당이 우리를 받쳐주고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허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고를 겪기도 하고 믿었던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 믿음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 세상이기에 믿음은 너무나 쉽게 흔들립니다.

믿음보다 더 강한 힘이 있는데 그것은 희망입니다. 우리가 어지러운 세상의 불의를 보고, 자연재해로 삶을 터전을 잃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다시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시간에 의해 제약을 받습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뭔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없다면 희망을 잃게 되고 우리는 절망 속에 살 것입니다.

하지만 희망보다 더 강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농부가 단순히 소출만을 기대한다면, 지속되는 흉작 후엔 포기해버리고 말 것이지만 천직에 재한 애착심이 있기에 다시 씨를 뿌립니다. 친구에게 몇번씩 배신당해도 우정을 지속할 수 있다면 그것은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뒤에 앉아계신 형제 자매님들 잘 들으세요.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의지하지 말고 사랑하십시오. 그래야 남편이 기댈 만한 곳이 못 되더라도 함께 살 수 있습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에게 기대하지 말고 사랑하십시오. 그래야 아내가 보잘것 없는 여자임을 깨닫더라도 계속 같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자식들에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설령 그동안 실컷 늘어놓았던 자식자랑이 헛되이 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실망하지 않도록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사랑해야 그들을 용납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여러분, 교회로부터 무언가 얻어가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교회 공동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십시오. 교회는 뭔가 얻어가는 곳이 아니라, 이미 얻은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전시장입니다.

다들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 들어보셨지요? 종교를 초월하여 그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사랑으로부터 오는 고통까지도 사랑하신 하느님(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의 모습을 하느님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이 부처님이든 마호메트이든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 부르든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겉으로는 종교와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바로 그 갈증을 채워준 것이지요.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태석 신부님은 누가 떠밀어서 그곳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그분에게 그 일을 하라고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갔고,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그 일을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성경구절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율법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형식에 매여 그 근간에 깔려있는 사랑을 보지 못함을 비판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온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이 사랑의 힘으로 밀려 움직이는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을 하늘에 있는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항상 함께 하는 분이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 2011년 2월 13일 연중 제6주일 청년미사에서 이상일 야고보 주임신부님

이쯤 되면, 한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과학적으로 하느님이 존재하느냐, 혹은 하느님을 인격신으로 봐야 하느냐 자연신으로 봐야 하느냐와 같은 논쟁은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존재의 형식이 무엇이건 간에, 하느님은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사랑의 가치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알려주신 분이다. 흔히들 그리는 이미지처럼 천국의 옥좌에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 삶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존재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하느님이라는 실체가 없다 해도 좋다. 창세기와 구약은 단순히 신화이고 성경은 예수라는 인물의 행적이 후대에 와서 신격화되어 포장된 것이라 해도 나는 상관없다. 역사적·과학적 사실이 무엇이건 간에, 삶을 살아가는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길을 가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큼직하게 붙여놓고 전도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마치 구원이라는 어떤 보상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오라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이 강론에서는 교회에 무엇을 얻으려 오지 말라고 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계기가 전화위복이기에 신앙도 구복적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심지어 사후세계에 대한 일종의 보험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자세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 것이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과 지향해야 할 가치를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죄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도 분명히 성경에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회개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나가는 것이나 세례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기저의 어떤 근본적인 변화로 사람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해성사로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도, 어떤 죄의 행위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랬는지 자신을 되돌아보고 작은 변화라도 일으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좀더 신앙적으로는 ‘하느님과의 끊어진 관계를 복원한다’라고도 표현한다.)

그래서, 나는 대놓고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외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전도하지는 않는다. (뭐, 미사 때 기도문에 나오는 정도는 하지만.) 그 대신, 나의 삶을 영적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생각하고 그 존재와 함께 걸어감으로써 더 강해지고 편안해지는 나를 보고자 한다. 어쩌면, 내가 살면서 만나본 몇몇 사람들처럼 ‘세상에 믿을 건 자신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자아가 강한 사람들은 그러한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별로 필요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스스로 혼란에 빠질 때 최소한의 판단의 기준으로서 사랑의 가치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기에 나는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믿으라고 이야기하는 대신에, 내가 내 삶의 자리에서 그러한 사랑의 가치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향기가 퍼져나가듯 은근히 국물이 배어나오듯 그러한 가치가 따를 만한 가치이고 복잡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탱함과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향임을 설득하고 싶다. 이태석 신부님처럼 아주 짧고 굵게 그 모든 가치를 한방에 보여주고 가실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 수도 없을 것이다.

나도 사람이기에 완벽하지 않아서 살다보면 죄도 짓고 화도 내겠지만, 적어도 반성할 때라도 그 기저에 깔린 가치가 사랑인지 항상 되짚어볼 것이다. 어려서부터 많은 사랑과 복을 받고 자라서일까, 이따금 사람들에게 좌우명 삼아 말하듯, 내 재능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싶다. 그 근간에는 나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깔려있다.

오늘 강론에는, 얻으려 하지 말고 사랑하여 마음을 비우라는 의미로는 어머니가 대략 나이 오십 중반을 넘기고서부터 자주 해오셨던 말씀들이, 영적 갈증에 대해선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한 친구와 여러 차례 걸쳐 나눴던 대화들이 모두 녹아들어있었다.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강론 중에 ‘하느님은 도덕교사가 아니다’라는 언급이 있었는데 그것의 더 깊은 뜻은 아직 모르겠다—때로는 논리적 엄밀함 대신 마음에 와닿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1. 이 강론이 최고로 느껴진 것은 신부님이 물론 강론을 잘 하신 것도 있지만 그동안 내가 살아온 경험과 축척된 생각들이 접점을 만나는 순간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