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내 또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가 자기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알더라도 별로 관심이 없거나. 이를 환기할 만한 일이 있어 포스팅해본다.

얼마 전 교수님이 포워딩하신 이메일을 하나 받았다. 학교 부서 중 하나인 연구처라는 곳에서 “연구노트 관리지침에 대한 안내문”이란 제목으로 보낸 거였다. 요는 교육과학기술부에서 2010년 8월 11일에 전부개정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관리 등에 관한 규정”이 2011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기 때문에, 우리 학교 또한 자체 연구노트관리지침을 만들어 관리해야 하니 그 지침을 준수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몇가지 주요 조항이 첨부되었는데, 그 중에 논란이 되는 것이 바로 모든 연구노트를 KAIST 소유로 하고 사본 소유를 원할 경우 연구책임자 승인과 기록관리팀 서면 보고가 필요하다는 제7조(연구노트의 소유) 부분이다.

연구노트를 양식에 맞춰 일일이 기록하고 연구책임자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든지, 전자연구노트 프로그램은 (가상머신이나 원격데스크탑을 쓰지 않는 한) 절대로 MacOS나 Linux에서 이용할 수 없는 구조라든지 하는 불편함은 둘째치고라도, 연구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아이디어나 관찰을 연구노트에 기록하게 되면 그것이 KAIST 소유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궁금해서 그 근거라고 하는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관리 등에 관한 규정’에 대해서 좀 조사를 해보았다.

우선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법에는 여러 등급(?)이 있는데 다들 알다시피 헌법이 가장 상위의 법이고 그 아래에 법률이 있다. 그런데 이 법률을 잘 보면 실무적이거나 자세한 부분들은 ‘~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와 같이 위임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대부분 해당 법과 관련된 실무부처에서 시행령을 만들어 국무회의에 올리면 대통령, 국무총리 및 관련 국무위원의 심사와 서명을 거쳐 그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 경우는 중앙행정부에서 만드는 법이라면, 지방자치제도에 의해 지방자치단체가 정하는 법들은 조례라고 한다.

해당 규정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발의한 것으로, 2010년 2월 4일 개정된 ‘과학기술기본법’을 바탕으로 2010년 8월 11일 국무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시 정운찬 국무총리와 안병만 교과부장관의 서명을 거쳐 통과된 것이다.

과학기술기본법 제11조의3(국가연구개발사업결과물의 소유·관리 및 활용촉진) 조항을 보면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결과물은 국가연구개발사업에 참여하는 연구형태와 비중, 연구개발결과물의 유형 등을 고려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연구기관 등의 소유로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에 따라 대통령령으로 2010년 8월 11일에 전부개정·공포된 규정에서는 제20조에서 해당 부분을 자세하게 정의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 주관연구기관의 소유가 되는 대상물 중 하나로 문제의 “연구노트”가 명시되어 있다. 개정되기 전에는 없었다.

※ 참고로 위와 같은 법령 정보는 국가법령정보센터라는 곳에서 손쉽게 검색해볼 수 있다. 모든 법령은 당연히 국민의 알 권리에 의해 누구나 볼 수 있게 되어있음은 물론이다. 나름 잘 만들어놔서, 언제 어떻게 개정되었는지를 해당 조항에 대해서는 일종의 diff처럼 볼 수도 있다.

처음에는 이것 또한 ‘학교의 새로운 정책’으로 생각해서 이놈의 학교가 또 왜 이러나… 싶었는데 자료를 뒤지다보니 (학교가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외부의 정치적 요인이 이렇게 영향을 끼침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법적으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결과물을 국가나 주관연구기관 소유로 못박는 것 자체도 그렇고, 법의 개정 이력을 뒤져보니 점점 법이 구체화되는 게 어쩌면 정부가 말하는 소위 ‘선진화’의 방향이 이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함께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case by case로 주관적 해석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수도 있겠으나 전반적으로는 국가가 너무 많은 걸 통제하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 사안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 세금으로 한 거니까 국가 소유라고 볼 수도 있겠고, 그래도 연구자의 창의성이 발휘된 부분이니까 연구자에게도 공로를 인정해서 공동소유권 정도로 해야 한다고 볼 수도 있겠고, 국가의 지원 목적이 과학기술진흥 그 자체에 있는 것이지 결과물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연구자의 소유권·저작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볼 수도 있겠고 등등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1

그런데 정말 궁금한 건, 이런 법률과 규정의 제정·개정 과정에 실제 연구자들의 의견이 반영될 여지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참여하는 법률인 과학기술기본법 자체로만 보면 별 문제가 없어보이는데, 실무적 세부 지침은 행정부에서 만든 규정을 국무회의를 통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니 그나마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개입 여지가 있는 법률과 달리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세력가들의 생각과 기조가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대통령 중심제’의 폐단인 걸까?

이 규정 개정에 서명한 이명박 대통령과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과연 위와 같은 고민을 하고 서명한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리고, 선거 때 후보를 고를 때 이 후보가 어떤 정책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1. 내가 법률 지식이 짧아서, 여기서 말하는 소유권과 저작권, 저작인접권 등은 어떤 차이점들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시는 분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큰 도움이 될 듯.